골목에서 찾은 부산다움

부산의 골목과 시장, 오래된 담장은 시민들이 날마다 마주하는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좌천동 가구거리가 형성된 배경과 범일동에 재봉틀 가게가 이어진 이유, 초량에 붉은 벽돌 담장이 남은 사연을 알고 나면 평범했던 거리도 부산의 역사를 품은 공간으로 다가온다.
부산미래유산 테마 투어 ‘부산다움’은 이러한 장소를 문화해설사와 함께 찾아가며 근현대 부산 시민의 생활과 산업이 이어져 온 과정을 살펴보는 프로그램이다. 버스로 주요 지점을 이동하고 방문지에서는 직접 걸으며 장소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반나절 일정으로 운영됐다.
미래에 전할 부산의 기억
부산미래유산은 근현대 부산을 살아온 시민들의 경험과 기억, 이야기가 담긴 유·무형의 대상 가운데 미래 세대에 전할 가치가 있는 유산을 뜻한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새로운 유산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오늘의 시민이 함께 기억하고 다음 세대와 나눌 만한 부산의 생활문화와 장소를 의미한다.
유명 관광지만 빠르게 둘러보는 여행과 달리 부산다움 투어는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공간의 의미를 되짚는다. 시장과 상점, 작업 도구와 창고의 흔적처럼 시민의 일상 가까이에 자리한 대상을 통해 도시가 성장하고 변화해 온 과정을 살펴보는 방식이다.
오래된 장소가 모두 같은 모습으로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건물이 사라지고 담장만 남기도 하며, 거리의 업종과 풍경도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질 수 있다. 부산미래유산을 돌아보는 일은 남아 있는 흔적을 단순히 구경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곳에서 일하고 생활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함께 살피는 과정이었다.
부산역에서 시작한 이로움 코스
2026년 9월 부산역 인근에는 부산다움 투어 참여자들이 모였다. 안내 책자와 명찰을 챙긴 성인 참가자들 사이로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도 눈에 띄었다. 평소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분주히 오가는 부산역 주변이 이날만큼은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살펴보는 출발점이 됐다.
이날 코스의 주제는 ‘이로움’이었다. 부산의 산업과 상업이 어떠한 공간을 중심으로 이어졌는지 알아보는 일정으로, 부산역을 출발해 좌천동 가구거리와 부산진시장, 범일동 재봉틀거리를 거쳐 남선창고 터로 향했다.
- 부산역 출발
- 좌천동 가구거리
- 부산진시장
- 범일동 재봉틀거리
- 초량 남선창고 터
버스가 출발한 뒤에는 김민정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해설은 말로만 진행되지 않았다. 태블릿에 담긴 자료가 함께 제시돼 참여자들은 앞으로 방문할 장소의 배경을 미리 확인할 수 있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부산의 거리와 화면 속 자료가 맞물리면서 현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각 장소를 이해하는 과정이 시작됐다.
살림의 역사를 품은 좌천동
첫 방문지는 좌천동 가구거리였다. 가구를 구입하는 장소로 알려진 거리지만, 투어에서는 판매되는 물건보다 거리의 형성 과정과 이곳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에 초점이 맞춰졌다. 참여자들은 좌천역 인근에 모여 해설을 들으며 주변 상점과 거리의 모습을 차분히 살폈다.
좌천동 가구거리는 195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가구를 제작하는 일과 가구에 사용될 자개를 가공하는 일이 서로 연결되면서 인근 자개골목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한 거리 안에서 완성품만 판매된 것이 아니라 재료를 다듬고 물건을 만들며 손님에게 판매하는 과정이 이어졌던 셈이다.
이곳의 가구들은 누군가의 혼수를 채우고 새로운 집의 살림을 마련하는 데 쓰였다. 그 뒤에는 가구를 설계하고 만들고 다듬은 작업자와 물건을 판매한 상인들의 손길이 있었다. 거리의 이름만 보면 가구점이 모인 상업 공간으로 보이지만, 형성 배경을 들여다보면 부산 시민의 주거생활과 노동의 역사가 함께 자리한다.
좌천동 가구거리는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인 동시에 부산 사람들이 새로운 생활을 준비했던 시간과 제작자들의 노동이 축적된 공간이었다. 해설을 들은 참여자들은 진열된 가구뿐 아니라 상점의 간판과 골목의 구조까지 살피며 평소와 다른 시선으로 거리를 걸었다.
부산진시장에 쌓인 삶의 순간
다음 방문지는 오랜 역사를 지닌 혼수·원단 특화 전통시장인 부산진시장이었다. 옷감과 혼수용품을 찾는 시민에게 익숙한 곳으로, 시장 내부에는 다양한 원단과 장식품, 생활 소품이 진열돼 있었다. 참여자들은 시장 입구에서 설명을 들은 뒤 안쪽으로 이동했다.
색과 모양이 다른 물건이 진열대를 채운 가운데 아이들은 작은 소품 가까이 다가가 하나씩 살펴봤다. 성인 참여자들도 상점 사이를 걸으며 물건과 공간에 관한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필요한 물건과 가격을 먼저 확인하는 일반적인 장보기와 달리, 이날 시장에서는 물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생활이 주요 이야기가 됐다.
부산진시장에서는 많은 사람이 옷감을 골랐고, 새로운 출발을 앞둔 이들은 혼수를 준비했다. 오랜 시간 자기 가게를 운영해 온 상인들의 삶도 시장의 역사와 함께 이어졌다. 물건이 오가는 경제 공간인 동시에 결혼과 이사, 생업처럼 시민의 중요한 순간들이 겹겹이 쌓인 생활 현장이었다.
시장 안의 원단과 혼수용품은 단순한 상품에 그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새 옷을 만드는 재료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가정을 준비하는 물건이었다. 상인들에게는 생계를 이어가는 기반이었다. 부산진시장의 역사는 결국 물건을 매개로 만난 시민들의 일상과 선택이 축적된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재봉틀거리에서 이어진 산업의 맥락
부산진시장을 둘러본 참여자들은 범일동 재봉틀거리로 이동했다. 거리에는 재봉틀을 뜻하는 ‘미싱’이라는 이름을 내건 가게들이 이어져 있었다. 시장에서 옷감과 부자재를 살펴본 직후 옷을 만들고 수선하는 기계가 모인 거리를 찾으면서 서로 별개로 보였던 장소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원단을 고르는 시장과 그 원단을 옷으로 완성하는 도구가 자리한 거리는 부산의 상업과 제작 활동이 연결된 모습을 보여줬다. 상품 판매가 한 공간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재료 구매와 제작, 수선으로 이어지는 생활 산업의 흐름이 인접한 지역에 형성돼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봉틀이 전시된 공간에서는 여러 대의 오래된 장비를 가까이에서 관찰하며 설명을 듣는 시간이 마련됐다. 선반 위에 놓인 재봉틀을 처음 보는 아이들은 장비의 형태를 유심히 살폈고, 어른들은 익숙한 옛 물건을 마주한 듯 해설에 집중했다.
재봉틀은 옷 한 벌을 만들거나 해진 곳을 수선하는 도구다. 동시에 기계를 사용해 생계를 이어온 사람에게는 오랜 일터의 기억을 품은 물건이기도 하다. 같은 장비를 바라보더라도 어린 세대에는 낯선 기계가 되고, 앞선 세대에는 익숙한 생활 도구가 된다.
범일동 재봉틀거리에서는 한 가지 물건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세대의 경험과 기억이 만났다. 재봉틀의 기능을 배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장비를 사용했던 사람들의 노동과 부산의 의류 관련 생활문화를 함께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붉은 담장이 전하는 남선창고
마지막 방문지는 초량의 남선창고 터였다. ‘창고’라는 이름에서 큰 건물을 떠올릴 수 있지만 현재 현장에는 옛 창고의 흔적을 전하는 붉은 벽돌 담장이 남아 있다. 담장 곁에는 남선창고 터 안내판과 부산미래유산 표식이 설치돼 장소의 의미를 알리고 있었다.
남선창고 건물은 2009년 철거됐다. 온전한 건물 대신 남겨진 담장을 통해 과거 창고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참여자들은 붉은 벽돌의 표면과 안내판을 함께 살펴보며 지금은 사라진 시설의 역할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남선창고는 배로 들어온 물품 등을 보관하던 근대 물류창고였다. 특히 명태를 보관한 곳으로 알려져 ‘명태고방’이라고도 불렸다. 이후 부산의 산업이 변하는 과정에서는 합판과 신발, 가전제품 등 여러 물품을 보관하는 역할을 맡았다.
보관 품목의 변화는 부산 산업의 변화와 맞닿아 있었다. 명태에서 합판과 신발, 가전제품으로 이어진 물품들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 생산과 유통의 모습을 보여준다. 창고는 물건을 쌓아 두는 시설이면서 항구를 통해 들어온 물자가 도시 안으로 이동하는 과정의 한 지점이었다.
남선창고의 역사를 알게 된 뒤 바라본 담장은 단순한 낡은 벽과 달랐다. 물건이 드나들던 창고와 그곳에서 일했을 사람들, 물품을 실어 나르던 현장의 움직임을 떠올리게 하는 흔적이었다. 건물이 사라진 뒤에도 남은 일부 흔적과 기록을 통해 장소의 이야기는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이 도시의 유산으로
이날 방문한 가구거리와 시장, 재봉틀거리와 창고는 화려한 관광시설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생계를 이어가던 일터였고, 누군가에게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던 공간이었다. 부산다움 투어는 이처럼 평범해 보이는 장소에 쌓인 시민의 삶을 발견하는 일정이었다.
김민정 문화해설사는 바쁘게 이어지는 시민의 생활을 ‘위대한 일상’이라고 표현했다. 시민들이 지나치는 공간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돌아보고, 그 기억을 느끼고 공유해 미래 세대까지 이어갈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투어의 취지라는 설명이었다.
여행의 핵심은 오래된 장소를 많이 확인하는 데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어떻게 일하고 살아왔는지, 그 시간이 현재의 부산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생각하는 데 의미가 있었다. 어른에게 익숙한 거리와 물건이 아이에게는 처음 만나는 부산의 모습이 되고, 같은 장소에서 함께 해설을 들으면 한 세대의 기억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장소의 배경을 이해하면 이전까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간판과 작업 도구, 오래된 담장도 다시 보게 된다. 단순한 옛 장소가 아니라 도시의 생활사가 담긴 공간으로 인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부산미래유산은 거창한 기념물에만 머물지 않고 시장에서 물건을 고르고 가게에서 일하며 창고로 물품을 나르던 시민들의 일상까지 아우른다.
참여자들이 새롭게 본 부산
같은 길을 걸었지만 참여자들의 기억에 남은 장면은 서로 달랐다. 용호동에서 참여한 신영옥 씨는 평소 눈여겨보지 않았던 장소가 새롭게 보였으며 재봉틀거리에서 오래된 장비를 보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고 밝혔다.
부산역 인근에서 일한다는 사상구의 진정아 씨는 늘 지나던 지역의 새로운 면을 알게 돼 뜻깊었다고 평가했다. 다른 기회가 생기면 다시 참여하고 싶다는 뜻도 전했다. 익숙한 생활 반경 안에서도 설명을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도시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어린이 참여자에게는 몰랐던 부산을 알아가는 시간이 됐다. 대연동에서 참여한 이지안 어린이는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부산에 관해 알지 못했던 내용을 많이 배웠고 이해하기 쉬워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아이와 함께 참여한 주례의 안미순 씨는 책으로 접했던 역사를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고 서로 이야기할 수 있어 배울 점이 많았다고 전했다. 안내 지도와 실제 장소를 함께 살펴보는 과정은 글로만 배운 내용을 구체적인 공간과 연결하는 계기가 됐다.
만덕에서 온 박선혜 씨는 이번 투어를 통해 부산미래유산을 알게 됐다며 앞으로 더 많은 미래유산이 발굴돼 부산을 보다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기억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옛 기억을 되살린 성인과 새로운 사실을 배운 어린이, 부산의 이야기가 오래 이어지기를 바라는 참여자의 반응은 서로 달랐지만 공통점도 분명했다. 익숙한 공간을 다시 바라보고 그 의미를 다른 세대와 공유했다는 점이다.
투어 뒤 달라진 도시의 풍경
부산다움 투어의 출발지와 도착지는 같은 부산 안에 있었지만, 장소에 얽힌 이야기를 들은 뒤 거리의 풍경은 새로운 맥락을 갖게 됐다. 좌천동 가구점의 간판에서는 제작자와 상인의 손길을 생각할 수 있고, 부산진시장의 물건에서는 시민의 생활과 중요한 순간을 읽을 수 있다.
범일동의 재봉틀은 옷을 만들고 수선해 온 노동의 시간을 보여주며, 초량의 붉은 담장은 남선창고가 담당했던 물류 기능과 부산 산업의 변화를 전한다. 각각 떨어져 있던 장소들이 가구 제작과 혼수, 원단과 봉제, 물품 보관과 유통이라는 흐름 안에서 연결됐다.
부산을 살펴보는 방법은 새로운 관광지를 찾는 데만 있지 않다. 이미 잘 안다고 여겼던 시장과 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형성 배경과 시민의 삶을 확인하는 것도 도시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익숙한 공간을 다시 보는 순간 평범한 길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현장이 된다.
부산미래유산 테마 투어 ‘부산다움’은 과거를 구경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오늘의 시민이 무엇을 기억해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여정이었다. 가구거리와 시장, 재봉틀거리와 창고 담장은 부산 시민의 노동과 생활이 도시의 역사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오래된 거리에는 한 시대의 산업이 남아 있고, 시장의 물건에는 시민의 선택과 생활이 축적돼 있다. 건물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담장과 기록은 과거의 역할을 전한다. 평소 지나치던 골목을 조금 천천히 살펴보면 익숙함에 가려졌던 부산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오늘의 부산에서는 그렇게 일상의 공간도 세대를 잇는 도시 유산이 된다.
